2012년 2월 26일 일요일

1912년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하였다. 조발성치매증을 앓았는데 결혼 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혼, 딸의 자살 등 비극을 겪었으며 1962년 귀국해서도 순탄치 않은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즉조당()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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